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대전이 빚어낸 인류사 최악의 비극

홀로코스트(Holocaust)란 ‘번제’, 즉 짐승을 태워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된 단어다. 이는 일반적으로는 대 학살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지만, 주로 제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 학살을 지칭한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대신 ‘쇼아’라는 말을 쓴다. 이는 히브리어로 ‘대재앙, 절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명칭으로 민족의 대학살 비극을 부를 수 없다는 일종의 저항이다. 이제부터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불리는 홀로코스트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자.

홀로코스트 유대인 수용자들
유대인 수용자들

시대적 배경과 발생 과정

유럽 사회에 깊이 내재되어 있던 사상, 반유대주의

19세기 후반, 당시 유럽에는 반유대주의 사상이 만연해 있었다. 경제 공황이 장기화되고 삶이 피폐해지면서 그 불만 표출의 대상으로 유대인을 지목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미 이전부터 불평등과 수욕을 안고 살았다. 기독교가 깊게 뿌리내린 유럽에서, 그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이 축적해온 자본이 유럽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러모로 유대인들은 미움을 받을 요소가 다분했다.

히틀러의 등장

20세기에 들어서자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반유대주의에 관한 책에 심취했고 정치 활동 역시 반유대주의적 성격을 띤 ‘독일노동자당(후에 나치가 된다)’에 가입하는 것으로 시작한 인물이다. 그의 집권은 곧 유대 민족의 재앙을 의미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는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1차 대전 패배의 원인을 유대인에게로 돌렸다. 언변이 뛰어났던 히틀러는 수차례의 연설을 통해 대중들을 선동하였고, 유대인 증오 사상은 극에 달했다.

홀로코스트 히틀러
행진하는 히틀러. 유대인들에게 히틀러는 재앙과 같은 존재였다.

1942년, 홀로코스트의 시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유대인 탄압은 절정에 이르렀다. 1941년에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기도 했다. 기어이 1942년에는 ‘유대인 절멸 정책’이 국가 정책으로 결정되었다.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참상

강제 수용소와 게토(Ghotto)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 매우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을 시작으로 유대인을 사회에서 격리하는 각종 법령들이 제정되었으며 유럽 곳곳에 유대인 집단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12시간에서 14시간 동안 교대로 노역에 투입되었고, 병들거나 체력이 약해져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총살을 당했다.

또한 나치는 1940년경 게토를 부활시켰다. 유대인을 격리하던 거주구역은 14~15세기경부터 유럽 전역에 항상 존재했지만, 게토라는 용어는 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세워진 유대인 거주구역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18~19세기에 이르러서는 점점 사라지는 듯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목적으로 게토를 다시 설정했다. 게토 안의 유대인들은 신분을 나타내는 배지와 완장을 차고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비위생적인 환경 탓에 게토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사망했다. 여기서 죽지 않은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의 학살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폴란드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대인 대학살을 위해 설치된 강제 수용소로, 나치가 세운 강제 수용소 중 최대 규모였다. 1940년 6월에 최초의 수용자들이 이곳에 수감되었으며, 1941년에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학살된 것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번째 학살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두 곳인데, 두 가스실에서 한 번에 약 2천여 명의 수용자가 죽임을 당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 힘든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수용자들이 가스실에 들어가면 ‘치클론 B’라는 화학가스가 투여된다. 이 가스로 인해 수용자의 3분의 1이 즉시 사망하고, 20분 이내에 모든 수용자들이 사망한다.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는 소각로에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다고 한다.

집단 학살을 목적으로 가스실이 있는 수용소를 건설한 것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홀로코스트의 큰 특징이다.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희생자의 수는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우슈비츠 외에도 벨첵(Belzec), 헤움노(Chełmno), 야세노바츠(Jasenovac), 마자다네크(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 소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지에 이러한 수용소가 세워졌다.

나치의 생체 실험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는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체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등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나치에 동조했던 독일 의사들은 생체 실험을 위해 온갖 비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그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은 요제프 멩겔레다. 그는 눈동자의 색깔을 바꾸기 위해 사람의 눈에 물감을 주사하는가 하면, 마취 없이 이를 뽑고 뼈를 적출하거나 바닷물을 먹이고 전기충격을 가하기도 했다. 또한 쌍둥이에 유독 관심이 많아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실험으로 하룻밤 사이에 14쌍의 쌍둥이를 살해하기도 했다. 그의 실험에 의해 사망한 피실험자는 4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 학살
유럽에서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보여주는 지도

홀로코스트의 박해를 받은 피해자들은 유대인 외에도 소련의 전쟁 포로, 폴란드인, 장애인, 집시, 동성애자 등 여러 집단이 있었다. 이들 집단을 포함한 전체 희생자 수는 약 1,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중 유대인 희생자 수는 약 600만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정확한 통계가 아닌 추정치다. 600만 명 중 400만 명은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당했고, 200만 명이 질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특히 폴란드에서는 300만여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폴란드의 전체 유대인 인구 중 90%가 죽은 것이다. 그밖에도 헝가리에서 45만여 명, 루마니아에서 30만여 명,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등 발트해 국가들에서 22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 유럽 각국에서 유대인들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법

야드바쉠 박물관
야드바쉠 박물관 내의 기억의 전당 (Alexandre Rotenberg / Shutterstock.com)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언덕에는 ‘야드바쉠(Yad Vashem)’이라는 이름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있다. 1953년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남겨 기억하고자 하는 의미로 지어졌다. 이곳에는 희생자들의 유품과 메모, 일기, 편지 등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이 박물관의 ‘기억의 전당’에는 220만 점이 넘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담긴 페이지가 전시되어 있다.

야드바쉠 외에도 프랑스 파리, 미국 워싱턴D.C., 독일 베를린 등 세계 여러 국가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