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주의 란 유대민족의 고향이자 성지인 ‘시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의미한다. 시온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지에 있는 언덕이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이후 유럽에서 타향살이를 하며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고향 땅 시온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시온주의 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이유로든 미움받았던 유대인들

시온주의 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반유대주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반유대주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시온주의 의 필연성 역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향한 무시는 관행이라고 부를 만큼 유럽에서 당연해져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
먼저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당당하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쳤었다. 기독교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유럽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이 미움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지나친 선민의식
또한 그들의 지나친 선민의식도 차별을 더욱 심화시켰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서도 여전히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믿으며 다른 민족들과 자신들을 엄격히 구분했다. 이를테면 어떤 나라에 정착하더라도 그 고유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들끼리만 폐쇄적으로 사는 식이다. 전혀 타협하지 않는 이러한 모습이 유럽인들의 눈에는 아주 마뜩찮게 보였을 것이다.
돈을 밝히는 민족

돈을 밝힌다는 루머 역시 유대인들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이 생긴 데는 사실 유럽인들도 어느 정도 원인 제공을 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자만 농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자연히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좋든 싫든 유대인들이 생계를 이어갈 방법은 당시 가장 천하게 여겨졌던 수공업과 고리대금업 외에는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은 이 수공업과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해서 유럽 자본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유대인이 돈을 밝힌다는 편견은 사실 남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보편적인 심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드레퓌스 사건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항상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불합리함에 대해 유대인들은 대체로 적극적인 반항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럴 때마다 율법을 준수하며 자신들만의 공동체 의식을 더욱 강화하는 등 소극적인 대처로 일관했다. 그러던 그들이 맹렬하게, 내 나라 내 조국의 땅으로 꼭 돌아가야겠다고 뜻을 모으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다.
드레퓌스 사건이란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 혐의로 체포된다. 프랑스의 군사기밀을 독일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독일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적국이었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진 것도 모자라 베르사유 궁전을 점령당하고, 그곳에서 독일 제국의 통일 선포를 지켜봐야 하는 치욕까지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사기밀을 수많은 나라 중 하필 독일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드레퓌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유배를 당했다.

드레퓌스는 범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 범인은 따로 있었다. 진범은 바로 프랑스군 참모부 소령 에스테라지다. 불세출의 바람둥이였던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애정 행각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군사기밀을 독일 대사관에 팔아넘겼던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프랑스는 발칵 뒤집혔다. 소설가 에밀 졸라를 필두로 수많은 지식인들과 양심 있는 이들이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청했다. 결국 수많은 과정을 거쳐 드레퓌스는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결백이 밝혀지기까지 10여 년이나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를 간첩으로 지목했던 이유도 어처구니없었다. 편지 속 단어 중 4개가 드레퓌스의 필체와 유사했다는 것이었다. 편지 전체가 아니라 단어 4개 정도는 누구의 필체와도 유사할 수 있다.
사실 그가 범인으로 몰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온주의 (Zionism)가 대두되다
오스트리아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취재하러 온 한 기자가 있었다. 유대인이었던 그도 역시 처음에는 드레퓌스가 범인인 줄 알았으나, 사건의 경과를 보며 유대인을 향한 유럽 사회의 부당한 여론과 대우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유럽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한 차별은 평생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대인이 자신들의 인권을 보호받는 유일한 방법은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이른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유대인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기자의 이름은 테오도르 헤르츨. 헤르츨이 추진하기 시작한 ‘유대 국가 건설 운동’이 바로 시온주의 다.

벨푸어 선언
시온주의 는 점차 모든 유대인들을 단결시켰다. 한 개인의 허황된 꿈에 불과해보였던 의견이 모든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이러한 여론은 영국의 ‘벨푸어 선언’으로 이어졌다.
벨푸어 선언이 있기 전에 사실 영국은 이미 시온주의 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당시 영국이 식민 통치하던 우간다에 나라를 세우라는 제의였다. 그러나 시온주의 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고향으로 이끄시리라는 예언을 믿었던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0:3)
결국 시온만을 원했던 시온주의 자들의 열망은 영국의 외무 장관 아서 제임스 벨푸어를 움직였다. 벨푸어는 시온주의운동의 재정적 지원자였던 유대계 영국인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중략) 폐하의 정부는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본거지를 팔레스타인에 수립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 저는 당신이 이 선언을 시온주의 자 동맹에 전달하길 바랍니다.
밸푸어 선언으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들었고 유대인들은 차근차근 건국 준비를 하였다.
시온을 사모했던 유대인들의 정신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시온주의 를 내세울 수 있었을까? 어떻게 2천 년 동안 가지 못했던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사실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 땅을 우리가 달라고 한다면 중국과 세계 다른 나라들이 순순히 줄까? 이스라엘이 영토를 요구한다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인 일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어쩔 수 없는 영원한 유대인들의 고향이었다. 예루살렘, 그 중에서도 시온을 빼놓고는 유대인을 논할 수 없다. 그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이 시온이기 때문에 시온주의 운동을 펼친 것은, 한편으로 보면 “이제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물론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유대인인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유럽에 동화된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고향 예루살렘을 잊지 않고 항상 그 땅을 그리워했던 이들도 있었다. 타향살이에 지쳐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족끼리 모여 유월절을 지킬 때면 “올해에는 타국에서 유월절을 지키지만 내년에는 꼭 예루살렘에서 양을 잡을 것이다”라며 대를 이어서 희망의 끈을 이어갔던 유대인들이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의식은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1948년 5월 14일)에 잘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땅은 유대민족이 태어난 곳이다. 여기서 그들의 정신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처음 국가를 세웠고 국가의 그리고 세상의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창출해냈으며 세상에 책 중의 영원한 책, 성경을 탄생시켰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랑생활 내내 이스라엘 땅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있었고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의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기도와 희망을 결코 멈추지 않았었다.
선택의 기로 그리고 위기
미래를 모르기에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책임이 뒤따른다.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에게 놓인 선택지 앞에서 고민을 거듭했다. 그토록 바랐던 고향 땅에 돌아갈 기회가 생겼지만 그곳은 무엇 하나 없는 불모지였다. 유럽에서는 여전히 억압과 차별이 있었지만 여태까지 그들이 일궈 놓은 재산도 건재했다. 불확실한 미래를 보고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현재에 안주할 것인가.
결국 유럽을 떠난 유대인만큼 남은 유대인도 많았다. 그러나 유럽에 남은 유대인들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1,900여 년 전 조상들이 예루살렘에 갇혀 희생된 것처럼 자신들 역시 나치 독일의 손에 의해 학살수용소에 갇히게 될 것을. 그들은 유럽에 잔류함으로 인해, 후대에 ‘홀로코스트’라 불릴 혹독하고도 잔인한 시련을 선택하고 말았다.